중3 때부터 골프를 친 저는 가끔 오빠들과 라운딩을 나가곤 합니다. 매번 그러는건 아니지만 오빠들은 제 복장에 가끔 한마디씩을 합니다. 지난주는 그나마 용감한 셋째 오빠가 대놓고 한마디 하더라고요. "너 그러다가 공 맞는다." 남자치고는 나름 옷 입는 센스가 꽤 있으신 그 분? 은 매번 조거 바지에 나이키 바람막이 옷만 입고 필드에 나오는 저를 은근 뭐라하는 편입니다. 뭐 상관없습니다. 핸디 70대한테 어디 백돌이가 ... 조거 할아버지를 입어도 저는 당당합니다.
1.드레스 코드
"그러게 뒷 팀에서 보면 그린 위에 서리태 콩 떨어진 줄 알겠어." 웬일로 이 날은 둘째 오빠가 셋째 오빠와 편을 먹고 저에 드레스 코드를 뭐라했습니다. 아마도 앞 팀에 계신 그 분 때문 같았습니다. 그날은 앞 팀에 유명 여자 연예인이 동료들로 보이는 남자들과 공을 치고 있었습니다. 가끔 꺅꺅대는 소리가 들려와 상당히 신경이 거슬렸는데 오빠들은 그때마다 슬쩍 그 쪽을 쳐다볼 뿐 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쪽으로 가고 싶어 하는 눈친데?" 밥 값내기 골프였는데 다들 공은 치는 둥 마는 둥하며 앞 팀을 쫓기 바빴고 캐디가 거리 유지해야 한다 경고를 하자 그제야 천천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2.예쁜 그녀
페어 웨이 중간 지점에서 제가 그린 온을 한 순간이었습니다. " 야, 너 그러다 ***씨 공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라며 셋째 오빠가 저를 째려봅니다. "... 저 인간이랑 공치러 나오면 내가 울 아빠 딸이 아니다." 옆에 걷던 캐디가 말을 들었는지 시선을 피하면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중간 그늘집에 도착해 들어가려던 우리는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그들과 만납니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셋째 오빠는 냉면을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모르게 그 분의 미모를 칭찬했습니다. 너무 웃겨 같이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여자가 봐도 예쁘긴 예쁘더라고요. 첫째, 둘째 오빠도 좋은지 얼굴까지 붉히면서 은근 좋아라했습니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꺅꺅거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살짝 한마디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팬들에게 눈총 맞을까 무서워 꾹 참았습니다. 나중에 캐디님이 알려주셨는데 그 분이 골프장 회원이라고 하더군요. 부디 앞 뒷팀으로 안 만나길 기대하면서도 살짝 부러웠습니다.
3. 나도 입어보자.
`나도 좀 입어볼까?`집에 돌아온 저는 여기 저기 예쁜 골프복을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능적으로별 이상 없다는 후기가 용기를 줍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또 포기했습니다. 분명 남들은 신경쓰지 않겠지만 그렇게 짧은 스커트를 입고 200 이상을 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습관이 무섭구나. 이젠 깰 수가 없어.` 술 취한 김유신을 평소 기녀 집으로 데려갔던 말처럼 어느새 제 손가락은 나이키와 아디다스 바람막이 세일 상품을 폭풍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4. 나의 워너비`박인비`
`제2의 박인비` 한 번 되보겠다며 그 시절엔 밥 먹고 공만 쳤습니다. 당시 친구들은 백화점 세일이라며 하루가 멀다하고 문지방이 닳게 백화점을 방문했지만 저는 당최 그녀들을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빨리 공치고 싶어서 밥도 서서 먹던 저는 캐디보다 더 빨리 나와서 준비 운동했었고, 물론 당시의 복장이라 함은 아무거나 사도 품질이 기본 보장되는 스포츠 웨어로만 입었습니다. 20살 늦은 사춘기를 시작한 저는 어느날 문득 방 안을 꽉 찬 그 무채색 운동복들에 숨이 막혀 왔습니다. 그날 이후 공장 납품 직원이라도 된것 마냥 분류 작업에 들어갔고, 미개봉 트레이닝복은 친구들 생일 선물로 주었고 (당시엔 당근이 없었습니다.) 낡은 옷은 그냥 눈 질끈 감고 수거함에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겨 놓았던 나이키 트레이닝 복 몇 벌과 바람막이 옷은 엊그제 고양이가 앞 자크 고무를 뜯어먹어 흉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래도 뭐 볼 사람 없으니 그냥 입기는 할 건데 문제는 모자 끈을 가지고 놀다 뽑아 버려 오늘 아침 조깅 때 입고 나갔다 훌렁훌렁 벗겨져 너무 추웠습니다. Y존과 엉덩이를 덮어줘서 너무 편한 옷인데 버린 정말 아깝고 고민이었습니다. 오빠들은 위 아래 같은 색으로 그 옷을 입으면 `담배 사러 나가는 동네 아저씨` 같다고 놀렸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더 입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옷에 베인 그 몇 년의 땀 냄새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옷을 입고 걸었던 빗 속의 페어웨이를 잊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고 왠만한 새벽 이슬은 툭툭 털어낼 수 있는 우수 방수 재질도 맘에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상태를 유지하려 그 없는 시간에 직접 손 빨래를 했던 제 노고도 차마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상체 땀이 많은 저는 홑겹 안감 망사 처리가 되는 나이키 재질을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모자는 일반 야구 모자로 대체하고 봄부터 또 이 옷과 신나게 뛰어볼 생각입니다. 이렇게 망가져도 버리지 못하는 애착 물건이 생긴 것 보면 정말 나이를 먹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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