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 투석을 받고 계시는 어머니를 따라 병원을 갈 때면 항상 받아오는 표가 있다. 바로 권장 섭취 식품과 금기 식품이 그려진 책받침 모양의 책자이다. 솔직히 말해 도표에 제시된 그 `권장 식품`이라는 것들은 그저 생존 음식으로만 느껴질 뿐 어떤 생기도 즐거움도 느낄 수 없다. 그렇게 멍하니 책자를 보고 있으면 눈치 빠른 어머니가 말을 걸어오신다. "넌 운이 좋은 거야. 엄마 보면서 미리미리 음식 가려서 먹어. 진짜 똑똑한 사람은 다른 사람 고통 보면서 미리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야."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다른 사람이 아니기에 맘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소한 우리 집 식생활 패턴을 소개해 본다.
1. 고정된 시간에 소식하기
모든 것이 그러하다. 약 복용 시간이 그러하고 음식 섭취 시간이 그러하다. 매일 고정된 시간에 일어나는 일률적 행위는 육체와 정신에 안정감을 준다. 몸이 섭취를 준비하게 하고 섭취의 순간에는 긴장의 해소도 느낄 수 있다.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로 선정된 바 있는 `미즈노 남보쿠`의 「절제의 성공학」을 한번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다. 책에선 소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명은 하늘로부터 타고나지만 그것을 기르고 가꾸는 것은 음식이다. 음식을 절제하지 않으면 하늘로부터 받은 수명과 복을 다하지 못한다. 차면 기우는 것은 세상이치이기에 음식을 함부로 먹는 사람이 수명에 이상이 없으면 재산에 손실이 있거나 자손에 결함이 생긴다. 음식이 뱃속에 가득 차는 대신 재물이나 자손의 운명이 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서웠다. 내 가족이 육체의 고통을 견디며 터득한 바와 완벽히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소식은 어쩌면 우리 인간이 이루어야 할 최상의 `도` 일지도 모르겠다.
2. 유전력보다 생활환경
둘째 오빠가 신장이식을 받은 후 우리 형제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 질환을 탓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지금의 모든 결과는 사실 젊은 시절부터 관리하지 않은 우리 자신의 부주의 때문이었노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나와 동생은 집안 어른들의 젊은 시점 생활 패턴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눈물로 호소하시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정신을 차리고 조금씩 식습관을 바꾸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이른 저녁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최대한 풍성하게 먹으려 노력한다. 그리고 취침 전 산책을 해서 뱃속에 음식물이 다 소화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일이든 공부든 늦은 시간까지 진행하지 않는다. 먹고 싶은 것은 다음날 아침 식사시간에 100% 먹게 해 주시겠다는 어머니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은 별개의 상황이지만 우리는 매일 식사 전 감사기도를 한다. 어머니는 불교 신자시지만 감사 기도에 동참하신다. 조상님과 먼저 가신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그리고 음식이 눈앞까지 올 수 있도록 수고해 주신 분들께 감사기도를 올린다. (물론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다. 많이 아프고 나서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육체의 고통에 고개 숙이지 않은 인간은 없을꺼라 확신한다.)
3. 금기 식품을 금지한다.
안 먹다 보니 이젠 먹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 음식들이다.
a. 기름에 튀긴 음식
아무리 식물성 기름(불포화 지방)으로 튀겼다 해도 고온 가열로 나온 튀김은 되도록 먹지 않는다. `모닝 삼겹살`이 당연했던 우리의 식탁은 수육의 모양으로 바뀌어 기름기 빠진 고기와 야채로 대체되었다.
b. 소금에 절인 음식
바닷가에 본가를 둔 우리는 시골에서 철마다 올라오는 젓갈류와 말린 생선들로 매 끼니를 즐기며 살아왔다. 시중에서 파는 정제염이 아닌 직접 가마니 상태로 들여와 몇 년 간수를 빼고 사용하는 천일염으로 친척들이 직접 손질하신 식품들이었다. 하지만 이젠 우리 집 밥상에서 젓갈류는 사라졌다. 전통 음식 김치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한국인이 김치를 안 먹고 어찌 살겠는가? 하지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염가공 김치가 아닌 짠맛이 거의 없는 아삭한 동치미급의 김치를 먹는다. 숙성되면 나름의 새콤한 맛이 있어 물리지 않고 잘 먹고 있다.
c. 과자류
어머니는 본인의 주치의가 했던 말을 우리에게 자주 전달해 주신다. "쌀은 고급 탄수화물이야. 저탄고지 그런 거 유행 타지 마라." 쌀의 복합당은 과자의 단순당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고급 탄수화물이 맞다. 과자의 단순당은 분명 체내에 혈압을 급속히 상승시켜 인슐린을 많이 분비시키는데 이러한 갑작스러운 과잉 포도당을 흡수해 줄 수 있는 것은 자잘한 정상 세포들이 아닌 이제 막 성장 단계에 있는 에너지가 필요한 암세포들 뿐이다. 다시 말해 쌀은 체내 포도당 수치를 천천히 올려줘서 괜찮지만 과자, 빵 등은 수치를 급격히 증가시켜 암 성장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d. 청량음료와 아이스크림
술. 담배를 전혀 해 본 적 없는 내가 지방간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가장 먼저 나에게 음료와 빵의 섭취를 제한시켰다. 평소 시간에 쫓기는 나는 책상 옆에 빵과 콜라를 쌓아 놓고 일 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가 돈을 버는 속도를 훨씬 앞질러 내 몸을 먼저 망가트렸다. 의학 지식 사이트에는 콜라에 들어있는 캐러멜 색소는 암이나 기형아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사이다 역시 인산이 들어 있어 칼슘의 배설을 촉진하므로 골다공증은 피할 수 없었다. 최근 내 입안에서 터지는 작은 알갱이들을 콜라가 아닌 탄산수로 대체되어 나를 위로하고 있다.
e. 아이스크림류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은 이러한 절대적 자연 진리를 간단히 역행해버리는 인간이 만든 플랑켄 슈타인 같은 화학물질이다. 물과 기름의 혼합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화제를 왕창 써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몸에 들어가면 이미 섭취되어 있던 음식물 속의 유해 성분까지 잘게 녹여 체내 흡수를 유도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콜레스테롤등도 대부분 지용성인지라 아이스크림 속 유화제에 녹여져 체내 지방에 바로 흡수 된다.
4. 옆 집에 사시는 102세 할머니
손녀가 해 줬다면 손톱에 핑크색 매니큐어를 칠하신 옆집 할머니가 놀러 오셨다. 평소 꾸미기를 즐기시는 할머니를 어머니는 곱다시며 매번 그렇게 칭찬해드린다. 어머니의 고향 인근에서 태어나셨다는 할머니는 평소 어머니를 딸처럼 아껴주신다. 그래서 일까? 곧 70이 되시는 어머니께도 "나이도 어린 게 왜 그리 비실거리냐"며 거침없이 핀잔을 주시기도 하신다. 사실 이게 할 말이 없는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께선 올해 102세가 되시는 우리 동네 최장수 고령자시다. 나는 평소 할머니의 그 짱짱한 유전력을 너무 부러워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 그녀의 삶을 대하는 자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게 맛있나?"
매일 아침 아들 내외와 손주들이 모두 집을 나서면 할머니는 여지없이 우리 집으로 건너오셔서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셨다. 재택근무 중이던 나는 열린 문틈 사이로 할머니의 말소리를 들으며 타이핑을 치고 있었다. "우리 애들은 뭐가 그렇게 맛있다고 피자, 콜라를 사흘에 한 번씩 문지방 닳게 사 먹는지 모르겠어. 아범은 또 어떻고 일요일 특식은 라면을 먹는거야. 멀쩡한 밥을 두고 뭘 그리들 헛배를 채우는지. 원..." 할머니가 평소 즐겨 드실 음식들이 눈 앞에 훤히 그려졌다.
"그냥 하면 되는 거지. 못하는 게 어딪어"
글을 배우신 적 없는 할머니는 재작년 겨울 내내 우리 집에 오셔서 어머니께 글을 배우셨다. 자식이나 손주들에게 부끄럽다시며 비밀로 해달라고 하셨다. 거창한 글은 아니셨고 그저 아들집 주소와 우리 집 주소를 손녀가 쓰다 남김 스케치북에 연필로 반복해서 써보시는 거였다. 그리고 봄이 되자 항상 그러셨듯 다녀오겠다며 씩씩하게 시골집으로 내려가셨다.(할머니는 겨울에만 아들집에서 생활하신다.) 그 해 우리 집은 할머니가 보내주신 어제 막 듯 보이는 진액이 잔뜩 묻은 애호박과 진딧물이 살아 꿈틀거리는 옥수수를 택배로 받았다. 슈퍼에서는 감히 사 오기도 겁날 듯한 엄청 넓적한 늙은 호박 두 통이 가을 향기를 품고 우리 집으로 배달되기도 했다. "호박 신장 좋다." 할머니는 또 어디선가 다른 글도 배우신 듯 삐뚤빼뚤한 글씨로 꾹꾹 눌러 엄마에게 추가 멘트도 보내셨다.
"어차피 다음번엔 사람으로 못 태어나."
"사람은 평생 지도 모르게 죄 짓고 사는 거여. 지는 깨끗한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거든. 내 생각에 다음 생에 또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오래 살면 정말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는 걸까? 할머니가 슬쩍 식탁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 나와 내 동생을 보고 씩 웃으셨다. "그러니께. 니들도 최대한 재미지게 살어."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내가 당시 느꼈던 그녀의 장수 비결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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